카테고리 없음
[릴레이 에세이 강을 말한다]①강을 강 뜻대로 흐르게 하라
jejutaxitour
2008. 3. 21. 18:12
[릴레이 에세이 강을 말한다]①강을 강 뜻대로 흐르게 하라 | ||||||
입력: 2008년 03월 21일 16:52:27 | ||||||
시작하며
미국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1990년대 초반 어느 날, 뜻밖에도 서울대학에서 귀국할 의사가 있으면 한 번 나와 세미나를 하라는 요청을 받아 졸지에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다. 요즘 유학생들과 달리 그 당시에는 일단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면 집에 다니러 오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게는 무려 12년 만의 고국 나들이였다. 김포공항으로 마중 나온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나는 올림픽대로를 따라 몰라보게 변한 서울의 한복판으로 달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때 아버지는 내게 강 양안을 따라 뻗은 늠름한 도로를 가리키며 한강의 기적에 대해 힘주어 설명하셨다. 늦은 밤이라서 한강의 표정을 정확하게 읽을 수는 없었지만 내 귀에는 죽어가는 강물의 신음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차는 어느 새 소년 시절 내가 시를 쓴답시고 종종 찾았던 샛강가 목장이 있던 대방동과 여의도 사이를 지나고 있었다. 나는 진심으로 고 정주영 회장를 존경한다. 그의 근면함, 성실함, 남다른 비전, 그리고 약간의 촌스러움까지 사랑한다. 하지만 자동차들로 하여금 한강을 따라 질주하도록 허락함으로써 서울 시민에게서 강을 앗아간 과오만은 결코 용서할 수 없다. 물론 그 당시에는 강에 대한 우리 모두의 이해가 지금 같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모르는 게 약일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알아야 한다. 그래야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고 사랑도 할 수 있다.
세계 어느 나라에 서울처럼 늠름한 강줄기가 도심 한복판을 가로질러 흐르는 대도시가 있는가. 세상 사람 모두 한 번쯤은 꼭 가보고 싶어 하는 그 유명한 파리의 세느강은 사실 강도 아니다. 내 눈에는 그저 널찍한 하수도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그에 비하면 우리의 한강은 참으로 도도하고 멋진 강이다. 그런 훌륭한 강을 우리는 기껏해야 밤에 잠이나 자는 아파트 숲으로 뒤덮어버렸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내게 만일 막강한 권력이 주어진다면, 나는 제일 먼저 올림픽대로와 강변북로를 걷어낼 것이다. 그래서 한강을 시민과 동물들에게 돌려줄 것이다. 강은 시멘트 옹벽으로 보호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과 동물들이 내려와 발을 담글 수 있어야 되살아난다. 몇몇 선택받은 사람들의 주거지를 확보하는 데 그칠 게 아니라 한강을 서울 시민은 물론 세계인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자연친화적인 곳으로 만들면 엄청난 경제적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제대로 된 ‘한강의 기적’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그 기적은 물을 진정으로 존중할 때 일어날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문명은 거의 대부분 강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아프리카 초원에 사는 동물들의 하루 일과는 오로지 물을 중심으로 벌어진다. 원시 사회의 족장들이란 대체로 물 웅덩이를 소유하고 관리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예로부터 ‘치산치수(治山治水)’가 국운을 좌우한다고 했으리라. 하지만 현대 생태학은 ‘다스릴 치(治)’에 대해 적지 않은 불편함을 느낀다. 그 옛날 생태학 지식이 부족하여 우리 인간이 오만하던 시절에는 다스려도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물은 다스리는 게 아니다. 이 세상에 물처럼 고집스러운 게 또 있을까 싶다. 그동안 우리는 물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엄청나게 많은 과오를 저질러왔다. 댐을 건설하는 것이 모든 상황에서 최상의 해결책이 아닌 줄도 모르고, 우리는 이 땅의 거의 모든 물줄기의 목을 조였다. 하천이 구불구불 흘러야 하는 나름대로의 생태학적 이유가 있다는 걸 알지도 못하던 시절에 우리는 이 땅의 수많은 하천을 강제로 직선화하는 데 열을 올렸다. 참다 못한 강이 토해내는 노여움을 우리는 지난 몇 년간 분명히 보았다. 물은 섬겨야 하는 존재다. 해마다 거듭되는 물의 교훈을 지금쯤은 깨닫고도 남을 만한데 지금 우리 정부는 한강과 낙동강 전구간을 시멘트 벽으로 둘러싸고 그 안에 배를 띄우려 한다. 얼마 전 구미공단에서 낙동강으로 페놀과 포르말린이 흘러 들어간 사건이 벌어져 대구와 부산 시민들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경부운하가 만들어지면 이런 일이 사흘이 멀다 하고 일어날지도 모른다. 상당수의 일자리가 창출될 것이라는 달콤한 얘기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대다수가 이처럼 극렬하게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건 바로 운하사업이 물이라는 귀한 자원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깨끗한 물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은 이제 ‘경제 살리기’에 견줄 가치관이 아니다. 경제와 물을 섞으면 경제가 백발백중 패하게 되어 있다. 물을 절대 ‘물’로 보지 말라. 나는 많은 미래학자들과 더불어 오래 전부터 21세기 인류 사회에는 물로 인한 전쟁이 빈번해질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은 바 있다. 인류는 그 옛날 물을 두고 수없이 많은 전쟁을 겪었고 이제 또 다시 그 역사를 반복하려 하고 있다. 물 전쟁은 이를 테면 석유를 놓고 하는 전쟁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치열할 것이다. 석유는 다른 대체 에너지원이 있을 수 있지만 물은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대체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웃 나라와 강을 공유해야 하는 나라들의 시름이 깊어가고 있다. 나일강 유역에는 무려 10개의 나라가 들러붙어 있다. 나일강 발원지의 85%가 에티오피아에 있지만 물은 이집트가 압도적으로 많이 쓰고 있다.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이집트는 나일강이 그야말로 생명의 젖줄이다. 어머니 에티오피아가 젖을 거두면 아기 이집트는 굶을 수밖에 없다. 지금은 나일강 물의 1% 남짓밖에 쓰지 않은 에티오피아가 상류에서 훨씬 더 많은 물을 끌어다 쓰기 시작하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하기조차 끔찍하다. 강에 관한 한 우리는 대단히 운이 좋은 나라이다. 우리나라의 모든 물줄기는 다 한반도에서 시작되어 우리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우리끼리만 현명하게 잘 관리하면 된다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언론에는 유엔이 우리나라를 물 부족 국가로 분류했다는 얘기가 기정사실처럼 떠들고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90년 미국의 사설연구단체인 국제인구행동연구소의 다분히 비정상적인 계산 결과를 마치 유엔이 발표한 것인 양 오도한 것이다. 이 연구소는 한 국가의 연간 강수량을 전체 인구 수로 나눠 1인당 사용 가능한 물의 양을 산출하는 지극히 단순한 방법에 따라 국토는 좁고 인구가 많은 우리나라를 리비아, 오만, 이집트 등과 함께 물 부족 국가로 규정했다. 씁쓸한 것은 이 같은 호도의 배후에 어쩌면 건교부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댐을 건설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위해서는 더할 수 없이 좋은 분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말 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나라인지 또는 조금만 더 현명하게 물을 관리하면 큰 어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는 나라인지는 좀더 신중하게 따져볼 일이다. 어찌하다 보니 육지에 사는 동물들을 주로 연구하는 생물학자가 되었지만 나는 사실 물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물속에 사는 동물들에 대해서 나는 거의 신비로운 사랑까지 느낀다. 세계 어느 곳을 가든 그저 늠름한 물줄기만 발견하면 마냥 좋다. 그래서인지 강을 배경으로 한 두 편의 영화가 늘 내 기억 속을 흐른다. ‘돌아오지 않는 강’은 석고상 같은 얼굴의 미남배우 로버트 미첨과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여배우 마릴린 먼로가 나온 퍽 오래된 영화다. 뗏목을 타고 거센 물살과 싸우는 장면과 묘한 대조를 이루던 마릴린 먼로의 질척질척한 음성이 지금도 귓전에 생생하게 흐른다.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흐르는 강물처럼’은 미국 몬태나의 강을 배경으로 하여 제물낚시(fly-fishing)를 예술로 승화시킨 영화다. 두 영화 모두 탁월한 줄거리와 배우들을 갖고 있건만, 눈을 감으면 내 머릿속엔 그저 강물만 흐른다. 생명이 펄떡대는 강물의 소리만 들린다.
〈 최재천 /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교수 〉 |